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사랑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에베소서 5:29-30)

교회의 궁극적 기쁨은 무엇입니까?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 주권적이시고 완전히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께 신부로 드려지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기쁨을 구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는 교회의 기쁨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구하셨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기쁨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9-30에서 바울은 기독교 희락주의를 훨씬 더 강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실까요?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이고, 어떤 사람도 자신의 몸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간의 연합은 너무나 긴밀한 연합이어서("한 육체"), 교회에 행해진 좋은 일은 무엇이든지 그 자신에게 행해진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의 노골적인 주장은 바로 이 사실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의 신부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정결케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기에 따라서 어떤 정의하에서는 이런 것이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랑은 자기의 유익에서 자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특히나 그리스도적인 사랑, 갈보리의 사랑은 말입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이 본문과 어긋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관점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위해 하신 일을 본문은 분명히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 . . 같이 하라." 윤리학이나 철학에서 사랑의 정의를 가져오는 대신 성경 본문이 사랑을 정의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거룩한 기쁨에서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과 이기심은 다르므로, 사랑에서 자기 유익 추구를 배제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기심은 다른 이들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순결함 속에서 그 기쁨이 충만하도록,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난도 받고 때로는 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