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교리에 대한 목회적 생각

로마서 11:5-7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로마서 11장처럼 매우 교리적인 본문을 설교하는 목회적 의미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강해를 진행해 나가는 도중에 아마 몇 주마다 한 번 정도는 멈추어서 뒤를 돌아 보면서, 강해를 통해 함께 보고 있는 것들이 우리 의 삶 속에서 어떠한 실제적 의미를 갖는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최근 몇 주 동안 강해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1-10이며,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성경의 교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이미 로마서 8:29-33과 로마서 9:10-24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무조건적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에베소서 1:4), 누가 믿어서 비록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누가 믿지 않고 반역 가운데 고집해서 그들의 죄 가운데 합당하 게도 멸망할 것인지를 선택하셨다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은 인간의 의지(will)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의 지혜와 공의와 은혜에 의하여 모든 것을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무(nothing)에서 어떤 원인을 유래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베들레헴 침례교회의 중직자들은, 성 경의 역설(paradox)를 굳게 붙듭니다(역설은 모순(contradiction)이 아닙니다). 즉, 한편으로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며, 다 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고, 죄책을 지고 있고,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 믿음으로 나아오고 이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받도록 선택하셨다면, 이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에도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러한 진리를 우리는 로마서 8장과 9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서 11:1-10에서도 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바 무조 건적인 선택이 뜻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선택의 교리에 관한 목회적 생각에 대하여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계시하지는 않으십니다. 한편, 어떤 것들은 비록 그 지식이 너무 높아서 우리가 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좋은 것들 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 29:29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길,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감추어진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 들까지 우리가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좋지 않습니다. 예 를 들면, 사도행전 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거의 모릅니다 . 야고보서 4:14은 말씀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 라." 시편 131에 또 다른 예가 나와 았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말하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 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 다.

어떤 일들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부분적으 로 압니다. 우리가 이를 아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12에 서 말한 것처럼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 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는 선택의 교리에 관련하여서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하고자 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묻기 쉽습니다. 지나친 우리의 질문은 감히 하나님을 고발하고 공격하는 영역으로 넘어갈 큰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특정 교리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주는지 우리가 언제나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특히 실용적 사고에 길들어져 있고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교리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지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바로 그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어리석은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들은 그들 이 지금 배우는 것이 장차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지 모르더라도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러 구체적인 식탁 예절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배워 놓으면 나중에 커서 각종 공식적 비공식적 모임에 격조 있게 대처해나갈 수 있게 됩 니다. 아이들은 왜 숟가락을 특정 방법으로 잡아야 하는지, 그들의 팔꿈치를 식탁에서 떼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어떤 힌트도 얻지 못하지만, 그래도 부모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마치 태양은 제자리에 그냥 있고, 지구는 구형이고, 푸른 야채는 몸에 좋 고, 쥐약은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것처럼요. 만일 아이들이 왜 혹은 어째서 그런지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사실들을 부모에게 듣는 그대로 받아들여 알아야 한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어떤 교 리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교리들을 거부하고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우 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의 정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그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배워 놓으면, 나중에 언젠가는 그 지식이 우리를 보호했고, 혹은 우리를 강하게 했고, 혹은 우리를 겸손하게 했고, 혹은 우리를 깨끗하게 했고, 혹은 우리의 길을 지도하였고, 혹 은 우리가 다른 것들의 참됨을 볼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신뢰가 문제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만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을 신뢰합니까?

선택의 교리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이 교리를 우리가 아 는 것이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유익한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 교리를 배우는 유익 중 일부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선택의 교리 에 관한 두 번째 목회적 생각으로 인도합니다.

2. 선택의 교리는 교회가 진리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에 대하여 엄격성을 갖게 하는 강한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교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흘러가버리는 것이라든가 문화에 동화 흡수되어 버리는 것 등을 방지합니다.

선택의 교리는 축 늘어진 무기력한 마음에 단단함과 근성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인하 고 사고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행하는 생각들, 인간 중심적인 생각들에 휩쓸려가지 않게 합니다. 다 른 교리들이 희석되거나 잃어버려지지 않게 작용하는 놀라운 방부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참으로 객관적인 진리로 구성된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우리 마음에 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여기 한 예가 있습니다. 크리스채너 티 투데이 최신 호에서 척 스윈돌은 "포스트모더니즘"—"초월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에 대해 말합니다. 그 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힘을 잃고 있고 곧 구식이 될 것으로 보이는 네다섯 개의 징조를 문화로부터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가 교회들 에 요청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지금이야말로 목회자들, 학자들 그 외 평신도들이 성경적 세계관 에 뿌리내리고, 진리에 목마른 자들에게 이를 명확하게 변호할 가장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도전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지 바나는 최근에 미국 교회들을 돌아보는 투어를 끝마치고 우울한 보고서를 펴냈다. 이에 의 하면, 대부분의 교회와 평신도 지도자들—그 조사에 따르면 90퍼센트—이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리 시스템에 뿌리박고 있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경쟁하는 세상의 철학들에 대처할 수 있겠는가?

지금 문화 속에 고무적인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반대로 교회는 비지성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또한 말씀이 이끄는 메시지에서 떠나 이미지나 감정이 이끄는 메시지로 흘러가고 있다는 여러 징조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 라이오 방송국이 최근 토크와 설교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온통 음악만을 방송하는 쪽으로 전환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 주변의 더 넓은 문화에서는 이제 포스트모더니 즘이 막다른 길임을 점점 깨닫고 있는데, 그 시점에 오히려 우리들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엄 청난 아이러니요, 끔찍한 비극이다. ("The Postmodern Crackup," in Christianity Today, December, 2003, Vol. 47, No. 12, p. 72).

선택의 교리는 마음의 사고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비성경적 관 념들과 생각들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데 있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갑자기 그들은 성경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과 자기 자신의 무서운 인간 중심성에 직면하고 내적인 동요가 생깁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건설하기 위한 추구를 하게 됩니다.

3. 선택의 교리에 관한 세 번째 목회적 생각은 이렇습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역할을 차지하려고 넘보고 있는지 아닌지 테스트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입니다.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뒤집어 바꾸려는 시도는 어떤 한 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인간의 자치(autonomy)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모 든 권위를 의문시하며 심지어 인간들이 심판 보좌를 차지하고서 하나님의 존재 유무마저 심판하려고 드는 현대 세상에서는 인간이 하 나님의 역할을 차지하려는 시도가 더욱 문제가 됩니다.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해 로마서 9:6-23에서 매우 강력하게 말했 습니다. 고대부터 있었고 현대에도 존재하는 반대자들의 주장,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로마서 9:19-20).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역할을 바꾸려고 하는 것 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토기장이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고 계시는지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판단하고 있 는지 분명히 드러내는 교리는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또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욥의 모든 자기 변호 주장이 소비되고,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모든 잘못 인도하는 상담이 사라질 때, 그 문제의 요약은 이렇게 진술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 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42:1 -3). 다시 말하면, 욥아, 너에게 적절한 위치를 취하고 나의 말을 듣거라. 나에게서 배우고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말거라. 나를 신뢰하고 나를 고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욥이 최종적으로 말하길,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5-6). 선택의 교리는 우리가 고소하는 욥의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신뢰하는, 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욥의 위치에 있는지 우리를 테스트하는 것 입니다.

물고기는 젖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은 어디에나 다 물이 있습니다. 물고기 는 젖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200년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오만하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만은 현대 세상 어디에나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헤엄칩니다. 우리는 그러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옷감에 오만의 실이 짜서 엮여져 있습 니다. 우리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을 통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보 고 있기 때문에요.

여기 C.S. 루이스가 이러한 현대 세상을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고대인은 하나님께 나아가되... 고소된 사람이 그의 심판자에게 나아가듯 나아갔다. 현대인에게는 그 역할이 도치되었다. 그가 심판자이다: 하나님은 피고석에 앉아계신다. 그는 꽤 친절한 심판자이다: 하나님께서 전쟁, 기근, 그리고 질병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하 여 꽤 합리적인 방어를 제시하면, 적당히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재판은 심지어 하나님의 무죄방면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 지만 중요한 점은 사람이 재판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 계시다는 점이다. ("God in the Dock," in Lesley Walmsley, ed., C.S. Lewis: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London: HarperCollins Publishers, 2000], p. 36)

이런 것이 현대 세상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오만한 기류는 감지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런 오만한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문시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가정의 오만함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가 현대 세상 속의 오만의 대해에서 점 차 구출되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뼛속까지 그런 오만으로 적셔져 있는지 가장 효과적으로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시금석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의 도가니 안의 시험을 거침으로써 욥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 하나이다" (욥기 42:5-6)

4. 선택 교리에 대한 네 번째 목회적 생각은 이것입니다: 택함과 주권적 은혜에 대한 소중 한 진리의 겸손한 얼싸안음—이것은 토론이 아니며, 지적인 믿음도 아니며 말 그대로 겸손한 영접, 겸손한 얼싸안음입니다—은 급진적 이고, 사랑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역과 선교를 낳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물론 윌리엄 캐리, 아도니람 저드 슨, 데이비드 리빙스턴, 존 패터슨, 조지 뮬러,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등등 수많은 예가 더 있습니다). 크리스틴 칼슨은 Action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와 함께 잠비아의 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거의 1년간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단체의 이사 더그 니콜스는 결장암에도 불구하고 르완다에 선 교하러 간 사람으로서 위의 리스트에 포함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런 위험을 감수한 것은 그가 선택의 교리를 얼싸안았 기 때문입니다.) 여기 크리스틴이 추수감사절 아침에 우리에게 보낸 이메일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를 택하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는 택함받기에 합당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한 아버지의 선하심에 저는 끊임 없이 놀랍니다. 선택받은 것에 대하여 제가 감사하는 이유는 제가 무엇을 위하여 선택받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택함받았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도록 택함받았으 며,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 살도록 택함받았으며, 하나님이 선하심을 보고 맛보도록 택함받았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선택의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혹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가르침받았기 때문에 크리스 틴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바깥에 서서 쭈삣쭈삣 안을 들여다보면서 의심하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위와 같은 이메일을 통하여 안에서부터의 이야기를 듣기 바랍니다. 즉,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 리를 얼싸안고 그러한 교리의 품에 안기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효과는 여러분이 들 어왔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 효과를 들으십시오. 그녀는 이메일에서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 께서 바스코를 선택하셨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는 완고하고 무지하고 반역적인 거리의 아이였으나 어둠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 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스코의 삶 속에서 이미 보고 있는 열매는 그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저는 지난 해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선하심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거리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유일한 영원한 소망에 대해 그들과 나누는 사역의 일부가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위해 제게 주신 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저는 쓰레기 더미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이나, 더럽고 냄새나는 아이들과 같이 안락의자(작은 금속 물질 위에 의자 상판으로 골판지를 올려놓은 것)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무조 건적인 선택으로 시작하여 주권적 은혜의 교리를 얼싸안고 이에 얼싸 안기는 것은 먼저 그러한 유형의 급진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 희생적 사랑을 산출합니다. 그 후, 이 아름다움을 우리가 스스로 우리 안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진 리 안에서 즐거워하도록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사고 방 법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리고 선택의 진리가 이러한 효과를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다고 성경이 가르치냐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예(yes)입니다. 먼저 골로새서 3:12-13을 생각해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 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에 그러한 연결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이는 명백합니다. 은혜로 선택되었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었고,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유산한 사람 중 하나가 되게 하는 효과를 산출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하 고 잘못된 대우를 받더라도 이를 기꺼이 참을 수 있게 할 것이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나아가 잠비아라든가 기타 여러 곳, 여러 환경 속에서 사랑스럽지 않은 자를 사랑하게 만들 것입니다.

선택의 교리에 관한 지식 이 이를 알고 믿는 자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여기 또 있습니다. 로마서 8:3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면 아무도 고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영원히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였 나요? 그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효과를 예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과 기쁨을 느끼고 그리고 용 감하게 되고 두려움 없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옳바른 결정이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결정이지만 위험을 감수하여야 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마치 위험한 곳에 선교하러 가는 것처럼요. 이 때, 여러분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는 질문의 효과를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택하신 자"라는 단어 안에서 확신을 산출하 는 복음의 힘을 느끼십니까?

이는 논쟁할 교리라기보다는, 즐거워할 교리입니다. 이는 논쟁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 아니고 , 선교를 위하여 고안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분리시키려는 것이 아니고(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지만), 동정심 있고, 친절하고, 겸손 하고, 유순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5. 마지막 목회적 생각과 함께 마치겠습니다. 선택을 예 수 그리스도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1:3은 말씀하기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건져내시기로 계획하셨을 때, 하나님은 이를 행하시는 방법으로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 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은 그저 우리가 택한 자인지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이를 계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택에 있어 중심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택함받은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대신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요한복음 3:3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 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한일서 5:10). 즉, 그는 자신이 택함받은 자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와서, 그를 여러분의 구주와 여러분의 주와 여러분의 삶의 보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는 믿음으로 오는 자는 그 누구도 내어쫒지 않으십니다. 그는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는 의로 옷입혀 주십니다. 그는 성령을 주십니다. 그는 여 러분을 지키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선한 목자의 음 성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