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침체

시편: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느낌, 2부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
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
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
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
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
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속에 나오는 두드러진 정서로 영적인 침체를 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시편 42편 말씀을 근거로 영적침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볼 말씀이 바로 그 시편 42편입니다.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시편: 노래와 가르침

오늘 본문의 표제를 보니 우리가 지난주에 본 것이 생각납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고라자손은 제사장 집단인데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을 담당했습니다. 역대하 20:19에 고라자손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서서 목소리를 높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위 표제는 공중예배에서 아마도 이 시편을 가지고 노래했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우리가 나눈 내용입니다. 시편은 노래요, 시와 같습니다. 시편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정서를 일깨우고, 표현하고, 발달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위함입니다. 시와 노래가 존재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성만이 아니라 감정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편 42편의 표제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마스길”이라는 단어입니다. 마스길의 의미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은 번역하지 않고 마스길이라 그대로 씁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누군가를 지혜롭게 하다 혹은 가르치다는 의미입니다. 시편에 적용한다면 교훈하는 노래 혹은 지혜롭게 잘 작곡한 노래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지난주에 강조한 다른 한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시편은 교훈을 주려는 책이다. “복 있는 사람은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는 지난 시간의 두 가지 요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시편은 교훈이요, 노래입니다. 예수님은 시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편의 의도는 지성이 주는 생각이, 감정이 주는 느낌이 발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데 있습니다. 시편을 묵상하며 그 속에 잠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행하는 연속설교가 이를 위해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42편 개관

시편 42편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인데 본문을 개관하고 나서 영적침체 속에서 이 경건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여섯 개의 소제목으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 여섯 개의 소제목은 생각건대 우리가 어두운 시기를 대처하는 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들입니다.

시편 42편의 개관은 이렇습니다. 시편기자가 처한 외적 정황은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원수들이 “날이면 날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절 역시 동일한 내용인데 그러한 조롱 때문에 시편기자는 뼈가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고 노래합니다.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그 조롱 소리가 나의 뼈를 찌르는구나.”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조롱은 시인이 처한 정황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원수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기자의 내적인 정서는 우울하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5절과 11절에서 그는 자신을 “낙심한” 그리고 “혼란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3절에서 그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낙심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는 지경에 이릅니다. 7절에서 시편기자는 익사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싸움

이 모든 정황 속에서 그는 소망을 품고 싸우고 있습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는 낙심이라는 정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낙심과 맞서 싸웁니다.

지난 28년 간 베들레헴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바로 이 말씀으로 얼마나 많이 낙심의 무거움과 맞서 싸웠는지 모릅니다: ”존 파이퍼,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 하나님께 소망을.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게 될 테니. 이 비참한 기분이 사라질 거야. 이 시기가 지나갈 거라고.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자. 새 날이 밝아올테니.”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는 80년대에 우리교회 성도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고 화제가 된 말씀이어서 옛 예배당 바깥 벽에 “하나님께 소망을(Hope in God)”이라고 크게 표어를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당시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교회로 알려졌습니다.

외적인 정황이 시편기자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의 내적인 정서는 우울하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소망을 품고 있는 힘을 다해 이 문제와 씨름합니다. 정말 주목할 것은 이 시편이 끝날 때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씨름하지만 여전히 그가 소망하는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시편 42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는 혼란으로부터 소망과 자유가 주는 기쁨의 경험을 바라고 여전히 분투하고 있습니다. 바라던 대로 아직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콤씁쓸한 결말

이것이 만족스러운 결말인가요? 시편기자가 살아 온 인생의 여느 상황처럼 이 결말은 혼란스럽습니다. 그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고 그가 믿음으로 하는 싸움은 단호합니다. 하지만 바라던 소망, 평안, 찬양의 자리에 그는 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성경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있어서 일 것입니다. 오늘본문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시편기자가 낙심과 몸부림치며 싸우는 것을 주시하고, 우리가 밤낮으로 이 교훈을 묵상한다면,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영적인 정서가 발달하는데 하나님께서 크게 간섭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가 되고 우울함, 낙담, 혼란의 가뭄이 올 때 우리의 가지는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낙심에 반응하는 방식

원수들의 조롱이 뒤따르는 낙심과 혼란 속에 있을 때 시편기자가 이에 반응하는 모습을 여섯 개의 소제목으로 소개합니다. 이 순서대로 그는 반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중복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왜 이러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정황 속에서 그가 보인 한가지 반응은 하나님께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9절: “반석이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어찌하여 저를 잊어버리셨습니까? 왜 제가 제 원수의 압제로 신음하게 됐습니까?” 잊어버렸다는 건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과장스럽게 표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8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낮에는 주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양 노래가 나에게 있을 것이니.”

시편기자의 말은 하나님이 그를 잊으신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잊으신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왜 그의 대적을 물리치고 소멸하지 않으신 걸까요? 낙심을 표현할 때 우리 모두가 하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굴어서 잘못된 말은 입밖에 내지 않으면 좋을 텐데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우리는 말하는데 신중하지 못합니다.

1985년 욥기 강해설교를 하던 시절 이 진리가 교회로서 우리에게 얼마나 뼈저리게 와 닿았는지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후 수년 동안 우리는 욥기 6:26 말씀의 “바람과 같은 말”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대꾸합니다. “너희는 남의 말 꼬투리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이란, 바람과 같을 뿐이 아니냐? (표준새번역) 달리 말하면 절망에 빠진 사람이 말하는 것을 비난하지 마라. 그냥 내버려 두라. 그런 심정인데다 그가 아무 진전 없는 자기 생각에 갇혀있음을 깨닫는데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는 거지요. 바람이 불어와 날아가게 놔두라고 합니다. 바람과 같은 말이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왜냐고 묻습니다.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가 한 질문이 신학에 바탕을 둔 정밀함이 있다거나 정황과 어법에 꼭 들어맞는 질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셨다는 말이 아니었노라고 이내 밝힌다면 그런 질문은 바람과 같은 말이라 여깁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을 인정합니다.

둘째로 시편기자는 낙담 가운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을 인정합니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5절과 11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잊어버린 것 같다고 호소하지만 자신의 모든 대적 위에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7절 끝에서 그는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편기자를 짓누르며 혼란스럽게, 우울하게 하고 낙담케 하는 모든 정황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파도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믿음이라는 작은 보트 안의 바닥 짐입니다. 바닥 짐은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믿음이라는 보트가 뒤집히지 않게 지켜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삶에 닥친 파도로 인해 이것을 저보다 더욱 깊이 배웠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깊이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람과 파도에 방관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건 여러분의 심란함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권적으로 사랑하심을 그가 겪는 온갖 괴로움 속에서 그 괴로움을 통하여 인정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셋째로 그는 밤에 주님께 노래하는데 자신의 삶을 위해 탄원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이는 기쁨에 찬 소망의 노래가 아닙니다. 그는 그런 소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기쁨에 찬 소망을 추구합니다. 이는 노래로 하는 기도요, “내 생명 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가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노래로 기도한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짐작하건대 시편 42편은 이런 노래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을 밤에 부르는 기도송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낙심해서 밤낮으로 우는 상황에서 노래를 지을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없을 겁니다. 이러한 까닭에 찬송 시편이나 인생의 온갖 정서가 녹아있는 성가집을 곁에 두는 것은 유익합니다. 실례로 아이작 왓츠는 노래로 불리게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주의 얼굴을 숨기시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얼마나 더 지체하시렵니까?
언제야 저 하늘의 광선을 느끼고
이 두려움을 떨쳐내겠습니까?

가련한 내 영혼이
어느 때까지 헛되이 고생스럽게 씨름해야 합니까?
주는 말씀으로 나의 대적들을 다스리시고
이 극심한 고통을 더실 수 있나이다.

1912년의 찬송 시편에는 시편 42편의 시편기자가 밤에 기도송을 부른 식으로 그렇게 노래하게끔 이런 시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겠습니까,
오 주님, 주는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어둠이 주의 얼굴을 가리우니,
얼마나 더 두려움에 시달려야 합니까?
어느 때까지 슬픔으로 괴로워하며
낮으로 밤이 되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더 원수들이 나를 압제하고
힘으로 승리하게 하시겠습니까?

오, 주 나의 하나님, 나를 보시고
이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사망의 잠이 나를 감싸지 못하게
내 눈을 밝혀주십시오.
나를 모욕하는 원수가 이제
성공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원수들이 의기양양하여
내 곤경을 기뻐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이 노래는 기쁨에 찬 노래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노래입니다. 시편의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느끼는 삶이 이 노래를 짓는데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복음을 설교합니다.

넷째로, 시편기자는 자신에게 설교합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싸움에서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리를 설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로이드 존스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고 위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대부분의 삶이 불행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말하는 대신 자신의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드는 생각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들을 해 낸 것이 아니고 그 생각들이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으며, 어제의 문제들을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자아입니다. [시 42편에서] 시인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자아가 자신에게 말하도록 하는 대신에 자신이 직접 자아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영혼이 그를 낙심시키고,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말합니다. “내 자아야, 잠시만 들어라. 내게 네게 말하겠다.” 
- 영적침체와 치유 Spiritual Depression [새순출판사, 1995], pp. 29-30

십자가의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망할 가장 위대한 근거가 되시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내 자아야, 들어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시면 누가 너를 대적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너를 위해 내어주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아들과 함께 네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고소할 것인가?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참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누가 너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로마서 8:31-35, 설교자의 번역)

자신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이 시편기자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다고 하면 위와 같이 자신에게 복음을 설교했을 것이라는 거지요.

그는 과거의 경험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섯째, 시편기자는 기억합니다. 그는 과거의 경험들을 회상합니다. 과거 회중예배 때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오 우리 삶에서 회중예배의 중요성을 여기서 얼마나 많이 언급할 수 있는지요!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보내는 시간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실제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중예배에서 하나님 당신과의 만남, 당시와 그 이후 만남들을 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회중예배가 하나님의 신적인 간섭으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면 시편기자가 그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감상주의가 될 것입니다. 그는 향수에 젖지 않습니다. 그는 혼란과 낙담 가운데서 진정 하나님이 회중예배에서 어떤 분이신지 기억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더 분명히 합니다.

회중예배에 대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더 진지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드리는 회중예배를 돌아보고 여러분이 처한 위험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 1-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우리가 볼 때 시편기자의 반응을 정말 아름답게, 중대하게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위협하는 정황이 나아지기를 갈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적들을 부수는데 진정 갈급해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완화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적을 물리쳐 달라는 기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기를 시편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때 맺는 중요한 결실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고, 함께 하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고 경탄하는 가운데 만족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시편말씀을 함께 숙고하는 이 주간 이것이 저의 궁극적인 소망이고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어하는 것이 제 소망이고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얼굴을 보는 것

2절 끝 부분의 그럴듯한 번역은 내가 언제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입니다. 그 질문의 궁극적인 답은 요한복음 14:9과 고린도후서 4:4 [표준새번역]이 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요 14:9)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본다고 말씀합니다. (고후 4:4)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까지 늘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통해 그런 갈망을 허락하시길 기도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 설교, 김주성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