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생각하고 느끼기를 하나님과 함께 함, 3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 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 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지난 주 우리는 시편 42편을 통해 낙심이라는 문제를 올바로 대하는 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시편 51편을 집중해서 보겠는데, 죄책감에 짓눌릴 때라는 문제를 어떻게 올바로 대할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연속설교에 나타난 규칙성을 알아보실 겁니다. 그리스도인을 정의할 때 그는 낙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고 자신의 죄에 비참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것은 다름아닌 관계성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그 관계성은 낙심, 죄, 죄책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죄책감에 짓눌릴 때라는 문제를 올바로 대함

초대교회는 시편을 가장 중요한 성가집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시편을 성경에 두신 목적은 우리로 예수님의 제자다운 생각과 감정을 일깨우고, 표현하고,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낙심과 죄책감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어떠해야 하며, 낙심할 때와 끔찍하게 후회스러울 때 우리의 감정이 어떠해야 할지를 배웁니다. 시편은 우리가 그러한 낙심과 후회의 문제를 올바로 대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제가 드리는 기도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편말씀 가운데 사는 삶의 습관이 단단히 형성되어 여러분의 지성의 세계, 감정의 세계가 순전히 성경적인 지성과 감정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죄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든 다윗

시편 51편은 성경에서 흔치 않은 시편인데,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 정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런 표제로 시작합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밧세바와 더불어 일어난 이 사건을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성경이 이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사무엘하 11:2-5을 통해 보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를 은폐하고자 애씁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해서 그녀가 임신한 것이라 여기도록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을 내립니다. 우리아는 고결한 신하여서 동료 군인들, 부하들이 왕과 나라를 위해 싸우는 중인데, 자기만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노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속히 밧세바를 후처로 삼고 자기 죄가 은폐되게끔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합니다.

성경에서 일의 전모를 가장 축소시켜 표현한 말씀 중 하나로, 사무엘하 11장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사무엘하 11:27). 그러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시고 비유를 들어,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임을 다윗 스스로 말하게 하십니다. 나단은 다윗을 책망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왜 주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까?” 이윽고 다윗이 입을 열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나단 선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꾸합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사무엘하 12:7-15).

 “주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밧세바를 강제로 범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는 아기는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단은 “주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냥 그렇게요? 다윗은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명을 내려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아를 속였습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이 “[다윗의] 죄를 사하셨다”고 합니다(사무엘하 12:13). 이런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관인가요? 여러분은 강간, 살인, 기만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의로운 재판관은 그런 죄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길거리에 있는 네 사람과 복음을 나눌 때의 일입니다. 아동 성추행범도 용서받을 길이 있다는 대목에서는 도무지 제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용서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고개를 젓던 그들 모습이 떠오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한 가지 전제가 없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판결에 저 역시 놀라고 분노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그 같은 문제와 씨름했고,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로운 재판관이신 동시에 살인범, 강간범, 거짓말쟁이 그리고 아동 성추행범마저 의롭다 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상식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간과하심”

바울은 하나님의 그러한 간과하심을 로마서 3:25-26에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과 – 일반적으로 구약과 –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해하는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이 말씀을 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사무엘하 12:13이 말씀하는 바가 정확히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바꿔 말해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그냥 넘어가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윗의 부끄러운 죄를 그저 감추시는 것이라면, 우리의 놀라움과 분노는 정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감추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다윗을 대신해서 죽으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당시 다윗의 믿음을 보십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 베푸실 자비 그리고 장래 대속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속에서 다윗의 죄는 그리스도의 죄로 여겨지고 그리스도의 의는 다윗의 의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정당하게 다윗의 죄를 간과하십니다. 다윗이 범한 간음, 살인, 기만 죄를 간과할 때에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날 만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상식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그 대속의 죽음이 확인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위대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을 누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을 누리는 삶은 다윗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실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시편 51편이 묘사하는 바는 다윗이 어떤 마음과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로 그리스도인은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하거나 죄를 고백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리심으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사역은 그 자체로 완전해서 우리가 거기에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로움에 참여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미루어 생각할 때, 매일 죄를 고백하고 기도함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값 주고 사신 바를 누리고 적용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11-12).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매일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죄 사함의 대가를 온전히 치르셨고 이를 확보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다윗의 반응

시편 51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데서 오는 참담한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담고 있습니다. 죄책감에 짓눌릴 때라는 문제를 어떻게 올바로 대할지 말씀합니다. 이제 다윗이 자신의 죄에 반응하는 단계를 4개의 소제목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함

먼저 다윗은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존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세 차례나 간구합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따라,” 그리고 “주님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 이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4:6-7에서 약속한 바에 근거를 둡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죄가 사함 받지 못한 채로 있는 거지요. 그리고 어떠한 신비로운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죄가 사함 받을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신비로운 자비를 붙잡는 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속의 신비에 관해 다윗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신비를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문의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다윗이 하는 것은 무력한 채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주기를 기도함

둘째로 그는 죄를 씻어달라고 기도합니다.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슬초는 정결의식에 쓰인 나뭇가지인데 제사장들은 질병이 있는 집에 우슬초로 피를 뿌려 정결을 선포했습니다(레위기 14:51). 다윗은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제사장이 되셔서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다 인정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이것을 구하는 것은 합당합니다(요한일서 1:7-9).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대가를 온전히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다윗은 무력한 채로 하나님의 자비에 기댑니다. 둘째로 그는 이러한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고 정결케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죄의 심각성을 고백함

셋째로, 다윗은 적어도 다섯 가지 면에서 자기 죄가 극도로 심각하다고 고백합니다.

3.1. 다윗은 죄를 마음에서 떨쳐낼 수 없다고 합니다. 죄가 양심에 새겨진 것입니다. 3절: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늘 자기 앞에 죄가 있다고 합니다. 지은 죄가 눈 앞에서 영화처럼 계속 재생되고 있다는 거지요. 멈출 수가 없습니다.

3.2. 다윗은 자기 죄성의 엄청남이란 그것이 하나님만을 대적하는 데 있다고 고백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하나님을 멸시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 우리아, 자신의 죄로 태어난 아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정의하면, 죄는 다름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건 나쁜 짓입니다. 소름 끼치게 나쁜 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끔찍함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격입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인정하며 비상한 언어로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주께만 범죄하였다.”

3.3. 다윗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합니다.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4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옥에 보내더라도 하나님은 무고하실 것이다. 급진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회개는 이런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법입니다. 나를 지옥에 떨어뜨리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실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내가 아직도 숨 쉬고 있으며, 순전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자비로 죄 사함을 받았다. 다윗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주장합니다.

3.4. 다윗은 자신의 선천적 부패성에 주의를 돌려 죄책을 심화시킵니다. 5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선천적 부패성을 탓하며 개인의 죄책을 축소시킵니다. 다윗은 그 반대입니다. 간음, 살인, 기만 죄를 저지른 사실은 다윗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보다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타고난 죄성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하시지 않으면, 그는 더욱더 악을 행할 것입니다.

3.5. 다윗은 그저 외부의 법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빛을 거슬러 죄를 지었음을 인정합니다. 6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지혜로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죄가 그를 덮쳤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나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로 복을 받았다. 오 나의 타락이 얼마나 깊은지, 쏟아지는 빛을 거슬러 죄를 짓는구나.”

이와 같이 적어도 이러한 다섯 가지 측면에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과 하나님께 동의하며, 자기 죄를 정죄하고 자신의 부패성의 깊이를 고백합니다.

4.  다윗,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함

마지막으로 다윗은 무력한 채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 죄 사함과 죄 씻음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죄와 부패성의 깊이와 심각성을 고백하며 다윗은 용서 이상의 것을 탄원합니다. 자신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꾸시는 데만 열렬히 마음을 쏟습니다.

그는 적어도 여섯 가지 측면에서 이 변화를 위해 마음을 쏟고 간구합니다. 그 측면들에만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자 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꾸시는 데만 마음을 쏟습니다. 간음자, 살인범, 거짓말쟁이, 아동 성추행범은 자신의 과거 모습에 질색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4.1.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셨는지 확신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기도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속에서 택하심을 입었고 그것은 견고한데, 그런 기도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다윗이나 제가 기도할 때,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저를 택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대우하지 마십시오. 저를 히브리서 6장에 등장하는 성령을 그저 맛보기만 한 이들 중 하나와 같다고 하지 마십시오. 버림받게 놔두지 마시고 성령께서 저를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오 하나님, 제가 주의 자녀이며 절대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 확증해 주십시오.

4.2. 다윗은 새롭고 정직하고도 굳건한 마음과 영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여기서 ‘정직한 영’은 굳건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영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이런 류의 불안정이 더 이상 없기를 구합니다.

4.3.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주시기를, 자기 영혼이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고, 자기 잇속을 차리지 않고 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8절: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의 기도 어디에도 직접 밧세바와의 동침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죄는 전부 거기서 시작됐고, 그것이 기만을 낳고, 기만이 살인을 낳았다. 그랬던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면 우리네 콤플렉스가 모두 성(性)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 하나님의 시각을 대변해 -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적인 죄: 질병이 아닌 증상

왜 다윗은 성적인 억제를 위해 부르짖지 않을까요? 왜 사람들이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를 기도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그는 자기 눈을 보호해 달라고, 성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걸까요? 그 까닭은 다윗은 성적인 죄가 증상이지 질병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적인 죄에 무너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영혼은 한결같지 않으며, 확고하지도, 굳건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흔들립니다. 유혹을 받고 무너집니다. 그들 생각과 감정 가운데 마땅히 자리하셔야 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탓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경우에 비춰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본문의 기도를 통해 성적인 죄를 짓는 이들에게 참된 필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성(性)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이것을 구합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셔서 당신이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주십시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심오한 지혜입니다.

4.4.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기쁨이 찬양이 넘쳐흐르는 기쁨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15절: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뻐함이 만들어 내는 것인데, 하나님을 기뻐할 때 찬양을 가로막는 것은 자취를 감춥니다. 다윗이 구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오 하나님, 내 인생에서 내 마음을 무뎌지게 하고 내 입을 닫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하셔서 그 모든 것들이 찬양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기쁨이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되게 해 주십시오.

4.5. 다윗은 이 모든 일이 효과적인 복음전도로 결실되기를 간구합니다. 13절: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은 죄 사함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회복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홀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상한 심령으로 다른 이들의 치유를 도운 후라야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4.6. 우리는 마지막 논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정황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중에 자신을 산산이 부수셨고 (8절),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 된 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기쁨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기쁨은 모든 것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은 그 마음이 상하고 통회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이것을 건너뛸 생각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행복한 자녀 된 인생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죄가 지배할 때가 아니면, 우리는 본향에 가는 내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인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기쁨, 찬양, 간증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 찬양 그리고 간증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저보다 잘 표현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로 설교를 마칩니다.

그리스도에게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은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사람을 향한 것이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겸손한, 상한 심령의 사랑이다. 성도들의 갈망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겸손한 것이다. 그들의 소망은 겸손한 소망이다. 그들의 기쁨 또한, 심지어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울 때에도 겸손한, 상한 심령의 기쁨이다.
-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 [부흥과개혁사, 2005], pp. 478-4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