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 파트

하나남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 파트 1의 복습

하나 님의 하나님 중심성

어제, 빙하에 횃불을 들어 올리기 위한 시도 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만물 안에서의 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기 위한 시도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이름의 영광 을 위하여 하신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주력했습니다. 전 우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열정적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제였습니다 . 열정 ‘97 컨퍼런스의 주제는, 제가 알기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이 름의 영광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성은 사랑과 반 대되지 않는다

어제 얘기한 두 번째 요점은 이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성이 사랑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시 는 것이 사랑에 반대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생명 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높임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킨다면, 하나님은 이 우주상에서 자기 높임이 가장 큰 미덕이고 사랑 의 본질일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러한 점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높여서 다른 사람이 여러 분을 즐거워하게 한다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 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집중 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다움을 모방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에서 자기 높임이 사랑의 본질이요 기초 가 되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분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하셔야 합니 다.

우리는 사람이 상대방을 중심에 두어 사랑하듯 하나님도 그 렇게 하시길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일 수 는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무한히 귀중한 분입니다. 그에 비길 것은 없 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부족이 없으시게 충만하시며 스스 로 자기 충족하시는 분으로서, 그의 영광을 보충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필요 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없이 완전히 자충족적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은혜의 기초요 토대가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은혜의 중심으 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은 혜가 성경적인 은혜입니다.

내 기쁨은 하나님이 나를 우주의 중심 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쁨은 하나님이 영원히 우주의 중심되심에 있고 그와 교제하도록 나를 가까이 하사 영원토록 그를 보고, 알고, 즐기고,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만족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어제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하나 님의 하나님 중심성은 인류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 오늘… 이제까지 제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여러분의 삶을 위한 아주 놀라운 함축적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곳을 떠나서 교회나 학교로 돌아가서 해야 하는 일은 이렇습니다. 이제 최 선을 다해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주업으로 삼 도록 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그 전능한 능력을 따라 여러분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모든 힘을 가지고 기쁨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을 여러분의 영원한 주업으로 삼으십시오.

의무를 행하고 있어야 할 때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 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이 여러분의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C.S. 루 이스는 그의 뛰어난 설교, “The Weight of Glory(영광의 무게)”에 서 진단하기를,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기쁨에 너무 쉽게 만족되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정확히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바다에서 보내는 휴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빈민촌에서 진흙파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황금의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깡통의 허상을 끌어안 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됩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희 락주의가 아니고 진정한 만족을 향한 희락주의의 결핍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이 갖는 함축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조지 뮬러(George Mueller)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한 다. 그렇지 않으면 난 모두에게 무익할 것이다. 난 그들을 이용하고 그들 로 나의 갈망과 나의 공허를 만족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려 놓기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는 걸 당신의 목표로 삼아야만 합니 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되는 문제가 있습 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고, 일시적이고, 부적당하고, 만족을 주 지 못하는 기쁨에 집착함으로써 우리의 기쁨에 대한 용량은 쪼그라들어 버렸 고, 더 나아가 이제는 기쁨 없는 의무를 미덕의 본질로 만들면서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지 않는 변화되지 않은 마음을 은폐하려는 데까지 가버렸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도피주의적인지 깨닫습니까? 오늘 아침 저는 어떠한 윤리적 행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 미덕을 잃게 된다고 말하는 금욕주의 자와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들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성 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참된 경배, 미덕, 용기, 하 나님 중심성 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론은 자기의 영혼을 만족시 키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전혀 없으면서 그냥 묵묵히 자기의 의무 를 수행하는 그러한 사람을 덕스럽다고 하면서 높입니다. 그런 주장은 몹쓸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

저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 떠도는 그 무엇에 반대하여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캠페인을 25년 전쯤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 계속 제 가족을 그 안에서 키우고, 교회를 그 위에 세우고, 그에 관한 책들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츰 반대 주장들이 제기됩 니다. 성숙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몇몇은 이 집회가 여러 분의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패러다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15년 정도가 걸릴지도 모릅니다. 반 대에 반대가 꼬리를 물면서... 1968년에 저는 댄 풀러, C. S. 루이스 , 조나단 에드워즈, 다윗 왕, 그리고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것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 사고방식은 이렇게 작용합니다. 반대 주장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움씰하고는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울고 불고 몸부림치고 구하고 기도하고 말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반대 주장이 시 야를 맑게 정화시켜 줍니다.

반대 주장들

  1. 정 말 성경이 우리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이게 단지 존 파이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만 들어낸 설교방법인가?
  2.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예수님이 “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3. 이것 은 감정에 너무 많이 치중하는 것 아닌가? 기독교는 우리의 헌신과 결정을 통한, 궁긍적으로는 의지의 문제 아닌가?
  4. 어렵고 내키지 않을 때 의무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고귀한 개념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나?
  5.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닌 나를 만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 닌가?

반대 주장에 대한 답변

1.정말 성경이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 라고 가르치는가?

저의 답은 “그렇다” 입니다. 성경은 적어도 4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가르칩니다.

a) 계명으로

시편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제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만약 “간음하지 말라” 라는 계명이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 여호와를 기뻐하라”라는 말씀 또한 순종해야 합니다.

또 시편 32:11,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혹은 시편 100편,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이 것은 계명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또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런 말씀 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계명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b) 위협으로

제레미 테일러는 "우리가 기뻐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끔찍한 것들로 위협하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을 들었을 때 저는 그 표현이 독창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성경 말씀에 깊이 근거하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자 면, 신명기 28:47의 인용입니다. 이 신명기 말씀을 잘 살펴보면 충격적 으로 다가옵니다. “네가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 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면 끔찍한 것들로 위협하십니다. 이 분명한 말씀이 희락주의의 보증(warrant)이 되지 못한 다면, 그 무엇이 보증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기 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주업이 되게 하는 보증이 되지 않습니까?

c) 구원하는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위하시는 그 모든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예를 들어, 히 브리서 11:6 말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 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 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에게 가면 상 주 실 분에게 나아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혹은 그밖의 다 른 이유로 하나님께 간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또 요한복음 6:35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는 믿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나 요? 무엇이 믿음입니까? 요한의 신학에 의하면, 믿음이란 다른 그 어떤 것 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의 만족을 위하여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입 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좀 익숙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여 기본적인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d) 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추구를 저버리는 미친 짓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추 구하는 것을 저버리는 제정신이 아닌 미친 짓입니다. 이 구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2:12-13입니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 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말해 보십시오. 무엇이 악입니까? 우주를 놀라게(질겁하게) 하고, 하나님의 천사들로 하여 금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라고 외치게 하는 악… 악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향해 “고맙지만 됬어요(No thank you)” 라고 말하고는 텔레비젼, 성행위, 파티, 술, 돈, 명성, 좋은 집, 휴가, 새 컴퓨터 프로그램 등으로 고개를 돌려 “그 래! 좋아!”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친 짓입니다! 예레미야 2:12에 따 르면, 이것은 모든 하늘로 하여금 놀라게(질겁하게) 합니다.

이렇 게 적어도 네 가지 방법으로, 성경은 전력을 다해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존 파이퍼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확인해 줍니다. 따 라서 첫 번째 반대는 서지 못합니다.

2. 자기부인은?

예수님께서는 마가 복음 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신이 죽는 곳, 사형의 장소입니다. 이것은 까다로운 시어머니, 혹은 못된 룸메이트, 혹은 몸 안에 뿌리내린 질병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죽음입니다. 자기자신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파이퍼,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 영혼의 만족을 삶 의 주업으로 삼아 이를 추구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이단적인 것 아닌가?’ 저도 그렇게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을 읽었습니다(문맥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 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 이 말씀 배후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논리는 무엇입 니까?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오! 내 제자들이여, 너의 목숨을 잃지 말아라. 너의 목숨을 잃지 말아라. 목숨을 구해라. 너의 목숨을 구해라!”

-- “어떻게요?.. 어떻게요, 예수님 ?”

-- “잃어라”

-- “이해가 안되요, 이해할 수 없 어요, 예수님”

-- “내 말 은, 제자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나를 제외한 너의 모든 것을 잃는다 는 의미에서 네 목숨을 잃으라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세상에 대하여 죽어라. 명예에 대해 죽고, 부에 대하여 죽고, 죄악된 성행위에 대해 죽고 , 남보다 앞서기 위하여 속이는 데 대하여 죽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 에 대하여 죽어라. 죽어라. 그리고 나를 소유하라”

저는 자 기부인을 믿습니다. 황금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깡통을 부인하십시오. 바위 위에 서기 위해 자신의 모래를 부인하십시오. 포도주를 가지기 위해 자신의 불쾌한 물을 부인하십시오. 궁극적인 완벽한 자기부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기 부인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자 신에 대하여 하신 다음의 말씀을 믿습니다. 마태복음 13:44입니다: “천 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부 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얻기 위 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네, 이것은 한편 자기부인입니다. 동시에, 아니오, 이것은 한편 자기부인 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자신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자신—예수님을 모든 것보다도 더 사랑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찾는 자신—그 자신을 죽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새로운 피조 물입니다. 그러한 자신을 하나님께 넘치도록 드리십시오.

오! 저 는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이 이해하지 못 했던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 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말씀하시자, 제 자들은 완전히 대경실색해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하였습니 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 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 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 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그 때 그 목소리의 톤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베드로야,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 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 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 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네가 희생하는 어떤 것도 천배나 갚아지지 않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느니라. 네가 나를 위하여 순교를 당하여도 스스로 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라” 라고 대답하십니다(마가복음 10:17-31 참조).

그렇습니다. 저는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 님 안에서 완전히 만족되는 데 거리끼는 모든 것을 부인하여야 함을 믿습니 다. 이것이 성경의 자기부인에 대한 저의 이해입니다. 저는 데이비드 리빙 스톤과 허드슨 테일러, 이 위대한 선교사들이 생의 마지막 시점에 도달하여 , 아내와 건강과 기타 모든 것을 잃고서, 오직 한가지만을 제외한 모든 것 을 잃고서,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들과 다른 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희 생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들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압니다. 여러 분도 알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 청년 시절, 그의 목숨을 내려 놓으면서 다 음과 같이 말한 것은 철저히 맞는 말입니다. “자기가 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을 주고 자기가 잃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그것이 제가 믿는 자기부인입니다. 이로써 두 번째 반대는 기각당합니다.

3. 감정에 너무 치 우치는 것 아닌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결정이 아닌가? 의지의 헌신 아닌가? 감정은 그저 부수적인, 선택 사항에 불과한 것, 예를 들면 케이크 위의 장식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파이퍼, 당신이 말하는 기독 교는 비성경적으로 감정을 너무 중요한 위치로 높이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논쟁이 있을때, 성경을 읽는 것은 도움 이 됩니다—다음을 보았습니다:

  • 우리는 기쁨을 느끼도록 명 령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
  • 우리는 소망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시편 42:5,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 다: 누가복음 12:5, “영혼과 몸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 우리는 평화를 느끼도록 명령받았습니다: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고새서 3:15).
  • 열심을 느끼도록 명령받았습니다: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 지 말고(문자적으로는 ‘끓어오르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것은 선택 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케이크 위의 장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열심을 품고."
  • 슬픔을 느끼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 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러분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울어 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하는 슬픔을 함께 느껴야 합 니다.
  • 우리는 사모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베드 로 전서 2: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 다. 당신은 “나는 사모하게 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이것에 순종 할 수가 있나? 이것은 명령일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틀린 말 입니다. 물론 당신은 이러한 감정들을 임의로 켰다 껐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전히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저 녁에 얘기했던 그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지금 제가 말 하는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당장 따르도록 명령되었지만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의지의 힘이나, 결정으로, 혹은 헌신함으로 이를 해낼 수 없습니다. 기적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은 절박한 일 아 닙니까? 여러분의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의무들을 해낼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을 느끼도록 명령 받고 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 히 여기며”(에베소서 4:32). 용서는 단순히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렇게 느껴야만 합니다.
  • 우리는 감사함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할머 니로부터 선물을 받은 어린이를 보십시요. 선물은 검정 양말이었습니다. 윽 ! 어떤 어린이도 크리스마스에 양말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검정 양말이라니! 당신은 말하죠,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해야지.” 그럼 그 아이는 “양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죠.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감 사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의지를 강압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 닙니다. 의지력으로 그 양말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의지력으로 에베소서 5:20의 명령인 “범사에 감사하 라”는 명령대로 하나님께 고마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는 이상.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세번째 반대?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애정, 감정, 정서를 높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결정 중심적이고 헌신을 중시하는 의지적인 미국인의 ‘우린 할 수 있어(we- can-do-it)’ 종교가 그들을 추락시킨 지점으로 다시 복위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하나님을 섬기는 고상한 비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의무 아닌가? 파이퍼,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는 섬김 같지 않다.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 같지 않다.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행해 나가는 충성된 섬김으 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는 것을 배웠 습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몇몇 성경 구절 을 살펴 봅시다.” 하나님과 신자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은유는, 그것이 종 으로든, 아들, 딸, 혹은 친구로든 간에, 어떤 한 면만을 강조하면 거짓으 로 치우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은유 안에는 강조하면 진리가 되는 그런 요소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의 유비에서는 어떤 것이 거짓이고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이 두 가지(진리와 거짓)를 잘 구분시켜 줌으로써 당신이 섬길 때 신성모독하 지 않도록 도와주는 본문은 사도행전 17:25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 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여러분, 하 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분 은 당신이나 당신의 섬김이 필요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 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0:45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의 하십시오! 주의하십시오! 당신이 그를 섬기는 일에 돌입한다면, 당신은 그 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거의 모든 서신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5 와 마가복음 10:45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인자는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분명 악한 섬김과 선한 섬김이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섬김일까요?

선한 섬김은 베 드로전서 4:11과 같은 섬김입니다: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 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찬양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듣고, 운전을 하고, 기저귀를 바꾸고, 설교를 하는 데 있어서 항상 받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자는 영광을 받 고 받는 자는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사도행전 17:25 말씀—“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받는 사람인 양) 사람의 손으로 섬 김을 받으시지 않으신다”—을 거스르면 우리는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이 모임의 지도부들에게 마태복음 6:24—“한 사 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 지 못하느니라”—을 인용해서 섬김에 관하여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은 재물의 필요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재물을 섬기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힘과 시간과 노력을 다해 재물로부터 이익을 얻으려고 가차없이 사는 삶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재물을 섬김니다. 당신의 머리는 어떻게 영리한 투자를 하고 어떻게 가장 이익이 나는 방식으로 거래를 하고, 어떻게 낮은 가격을 찾아 올라갈 곳에 투자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재물로 부터 이익을 얻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재물이 당신의 공 급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재물을 섬기는 방법에 대한 진실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도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당신 의 삶의 태도를 취하고 자신의 삶을 조절해서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창 의력을 다해 자신을 하나님의 끝없는 축복의 폭포 아래 가져가는 것, 그래 서 그는 공급자로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받는 자로 남는 것, 당신은 수혜 자로 그는 후원자로, 당신은 배고픈 자로 그는 양식으로, 당신은 목마른 자로 그는 생수로 남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역할을 바꾸는 그런 신 성모독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섬기는 방법 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섬길 때 나는 받는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수혜자가 되고 내가 후원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 님이죠. 세상에 수많은 이런 종교가 있습니다. 이제 네 번째 반대 주장도 기각됩니다.

5. 당 신 자신을 만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자신의 기쁨 과 즐거움의 추구에 대해 말하고 있고 우리가 알아 왔던 것과는 다른 의무 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 우리는 섬김에 대해서 조심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당신은 성경의 말씀을 조절하고 조작해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드는 것 같이 들린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비판 중에 가장 격렬한 비판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12월 21일이면 결혼한 지 28년이 됩니다. 저와 제 아내 노엘은 서로를 많이 사랑합니다. 많은 일들을 같이 겪어 왔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들과 정말 좋은 시간들을 같이 보냈습니다. 우리는 십대였던 우리 아이들이 엄청나게 힘든 십대를 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들들과 어린 딸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눈 물을 흘립니다. 제가 12월 21일에 탐스런 28송이 빨간 장미를 등 뒤에 숨기고 집에 와서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다고 가정합시다. 제 아내가 문을 열고는 내가 왜 (열쇠로 열고 들어오지 않고) 초인종을 눌렀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 때, 숨겼던 장미를 보여 주고 “결혼기념일 축하하오” 라고 말 합니다. 그리곤 그녀가 “조니(존 파이퍼의 이름 존의 애칭), 정말 아름답 네요. 왜 이런 걸?” 했을 때 제가 대답합니다. “내 의무요.”

틀린 답이죠. 다시 돌아갑시다.

[딩-동]

—“결혼기 념일 축하하오, 노엘”

—“조 니, 정말 아름답네요. 왜 이런 걸?”

—“당신에게 장미를 사주는 것보다 더 날 기쁘게 하는 것 은 없어요. 사실, 오늘 저녁에 애들 봐 줄 사람을 연락해 놨어요. 오늘 저녁은 나가서 뭔가 특별한 일을 합시다. 당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늘 저녁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오."

이것이 맞는 답이죠.

왜? 왜 저의 그런 말을 듣고 제 아내는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기적이군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직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군요” 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무슨 뜻입 니까? 왜 의무가 틀린 답이고 기쁨이 맞는 답일까요? 이해하십니까?

이걸 이해한다면 (제 설교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마음 놓고 미네아폴리스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내 는 내가 그녀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내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습니다. 내가 우리 관계를 섬김의 관계로, 의무의 관계로 바꾸어 버리고, 그녀 안 에서의 나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경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갔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 바라보시면서 , “너는 왜 여기에 와 있나? 너는 왜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려 놓았나?” 하실 때,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여기 오는 것이 저의 의무 였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안 되겠죠. 오히려, “제가 이곳 이외에 다른 어 느 곳을 가고 싶겠습니까? 다른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이 저의 영혼의 소망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컨퍼런스는 이에 관한 것입니 다. 이 컨퍼런스는 이사야서 26:8의 말씀처럼 268세대 안에서 두 가지 위대한 것들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즉, 그의 이름과 명성을 위한 하나님 의 열정과 나의 모든 갈망을 만족시키려는 내 마음의 열정 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주 안에서 흔들릴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실은 하나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이름과 그의 명성은 우리가 그 안에서 가장 만족될 때,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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